[박수빈 변호사의 연애는 계약이다]환승이별, 나와 그 사이에 낀 제3자에게 책임 물을 수 있을까 (2025)

“혹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꼭 말해줘. 헤어져줄 테니까.” 연인과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되면 나는 꼭 이 말을 한다. 덤덤하고 쿨하게 말하곤 하지만 사실 반은 협박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연애감정을 품은 사람과 사랑을 이어갈 자신이 없다, 그런 일이 발생했는데 모르고 지나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헤어져버리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은 하나같이 자신의 사랑을 의심받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혹스러워했다. 마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내가 상대방의 배신에 느낄 데미지만큼이나 상대방이 나의 배신으로 느낄 데미지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공평함에 얽매여 있는 편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나도 혹시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면, 더는 내 연인에게 오롯이 마음을 집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좋아졌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만 헤어지자’는 말은 하기로 했다. 연애란, 서로만을 사랑하기로 하는 약속이니까 말이다.

[박수빈 변호사의 연애는 계약이다]환승이별, 나와 그 사이에 낀 제3자에게 책임 물을 수 있을까 (1)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의 벤(브래들리 쿠퍼)은 아내 제나인(제니퍼 코널리, 사진 위)을 두고 애나(스칼릿 조핸슨)에게 한눈을 판다. 그는 ‘환승이별’을 택한 걸까, ‘백업플랜’을 마련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계약 파기 과정에제
3자가 연루돼 있더라도
공모 등 특별한 사정 있을 때만
고의적 방해로 위법성 인정

결혼과 달리 연애는 자유경쟁관계
우리 사이에 침범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없어
사과는 떠난 연인에게 받아야 하고
관계를 깬 것의 비난도 그의 몫

■내로남불의 최전선, 환승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앞서 지금 연애 중인 상태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면 의외로 많은 친구들이 이런 조언을 한다. “딱히 다른 사람 만날 것도 아닌데 뭐하러 헤어져. 새로운 사람 생길 때까지는 그냥 만나.” 환승을 하는 사람의 친구일 때는 “네가 역시 똑똑하다”며 그 판단을 지지하지만, 환승을 당하는 사람이 내 친구면 “뭐 그런 무례한 사람이 다 있느냐, 결국엔 바람피운 거 아니냐”고 온갖 가능한 단어를 동원해 함께 욕을 한다. 그야말로 연애관계에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최전선에 ‘환승’이 있는 것이다(물론 어디까지를 환승이라고 불러야 할지 약간 고민스럽기는 하다).

그러다보니 특별하게 싸운 것도 아닌데 헤어짐을 말하는 연인을 보면 “다른 누가 생긴 거야?”라고 묻게 된다. 너, 지금 환승하는 거냐고, 나와 이별을 고한 즉시 다른 사람에게 웃으며 전화할 거냐고, 그 사람에게로 달려갈 거냐고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도 이별하는 순간에 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면 깨끗하게 정리할 요량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별을 말하는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나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우리 관계의 신뢰를 깬 것은 바로 너야,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무조건 네 잘못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아마 헤어지는 순간에 ‘혹시?’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헤어짐을 말한 연인은 다음 날 새 연인의 손을 잡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다음 만난 사람도 나와 헤어진 뒤 한 달 만에 새 애인이 생겼더라는 소문을 들었다. 연속해서 환승이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별을 당하고 나서 차차 생각하게 됐다. 아, 환승이별 이거 괜찮구나. 당하는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어도 그에게는 현명한 ‘백업플랜’일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환승이별을 당하고 나서 한동안은 내가 사랑했던 연인보다 내 연인이 새로 만나게 된 그 사람이 더 미웠고 더 오래도록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관계를 깬 것은 내 연인이건만 마치 누군가에게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연인이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를 누군가가 ‘빼앗아갔다’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편이 내 연인의 감정에 대해 직면하지 않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방식은 내 연인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연인의 사랑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약속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가치한 것처럼 저평가하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이가 아니고, 연인은 내 장난감이 아니다. 연인의 새 애인은 나와 연인이라는 물건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저 내 연인은 인간관계 속에서 이끌리는 대로, 혹은 조금 더 적합한 상대방을 찾아 나선 것일 뿐이었다. 연인이 나와의 약속을 깨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나와 내 연인 사이의 문제일 뿐, 나와 내 연인의 새 애인 사이의 문제라거나 세 사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제3자에게 권리주장을 할 수는 없다

일반적인 계약에서도 계약이 깨지는 과정에 제3자가 연루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제3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제3자가 이미 계약이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 둘 사이에 방해가 되는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그렇다. 그 과정에서 제3자가 계약 당사자 중 한쪽과 적극적으로 공모를 했거나, 협박 혹은 기만같이 사회질서에 반하는 방식을 활용해서 계약당사자에게 손해를 끼칠 생각으로 계약에 끼어들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에야 그 사람의 행위가 위법하고, 고의적으로 계약을 방해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쉽게 말해 A가 중요한 의뢰인의 부탁으로 반드시 특정한 도자기를 입수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근데 그 도자기를 B가 가지고 있어서 이를 거액을 주고 사기로 했는데, C가 뒤늦게 B에게 접근해 돈을 주고 A보다 먼저 그 도자기를 가져간 상황이라면 어떨까. 만약 C가 A의 급한 사정을 전혀 몰랐고, 그저 먼저 사기로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은 정도라면 A는 도자기를 먼저 산 C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만일 C가 이 도자기를 B가 A에게 팔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방해하기 위해 B에게 거액을 주고 이를 가로챈 것이라거나 B와 C가 A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공모를 한 것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례적인 사정이 인정될 때 A는 B뿐만 아니라 C에게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A에게 도자기를 팔기로 해놓고 C에게 홀라당 팔아버린 B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고 가장 합리적인 접근이다.

나와 연애관계를 유지할 의무와 책임은 기본적으로 이 관계를 약속한 나와 내 연인에게만 있다.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었다면 조금 달리 취급될 수 있기는 하다.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과 사랑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결혼을 깬다면, 바람피운 사람의 배우자는 자신의 배우자와 바람피운 상대방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사실 이 경우에도 바람의 상대방이 내 배우자가 기혼상태라는 것을 모른 채 속은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연애관계는 결혼처럼 법으로 보호되는 관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유경쟁관계이고, 그저 둘이서 만나기로 합의한 정도의 관계다. 물론 신뢰가 돈독하면 할수록 서로 간에 요구하는 책임의 크기도 커질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애인이 있는 것을 알면서 그 사람과 연애하는 제3자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해야 할 정도로 연인관계를 법이나 기타 규칙들로 보호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결혼처럼 법률의 보호를 받는 관계도 아닌데 제3자에게까지 우리의 관계를 침범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그저 연애상태를 공개적으로 표시함을 통해 배려받기를 기대할 뿐이다). 사과를 받는다면 환승을 한, 사실상 바람을 피운 내 연인에게 받아야 했고, 관계를 깬 것에 대한 비난 역시 제3자가 아닌 연인의 몫이어야 했다.

■환승한 그 사람 믿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궁금증도 생겼다. 연인의 새 사람은 그가 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를 겹쳐 만났다는 사실을 알까 하는 것이었다. 기존 연애에서 나에게로 ‘환승’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과연 이 ‘환승자’의 연애관계 유지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함을 어느 정도로 신뢰할 수 있을까? 나에게로 상대방이 환승한 것을 알았을 때 과연 그 사람과의 연애는 순탄할까? 나에게로 옮겨온 것처럼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또 옮겨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필연적으로 들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앞의 사람과는 무엇 때문에 헤어지게 된 것일까’가 궁금한 이유는 ‘이 사람이 나와의 연애관계에서 발생할 문제들을 과연 얼마나 버티고 함께 해결해 나가려고 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문을 해소하는 일은 결국 환승자가 새로운 사람에게 열과 성을 다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것뿐일 것이다. 연애라는 계약은, ‘사귀자’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다 되는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관계유지를 위한 노력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수빈

[박수빈 변호사의 연애는 계약이다]환승이별, 나와 그 사이에 낀 제3자에게 책임 물을 수 있을까 (2)

미학도로서 대학생활 내내 연극동아리 활동에 심취하며 살다가 로스쿨에 가 무대에 서는 배우 대신 법정에 서는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가 된 첫해에 재단법인 진실의힘에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함께 썼고, 현재는 법무법인 청맥에서 일하며 서울지방변호사회 이사, 민변 사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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